월-토 10:00 - 18:00
“영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지금 깊은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는 영혼이 이 충동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지상의 향연으로 인해 무성하게 달라붙은 바위와 따개비들이 벗겨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라…”
— 플라톤, 『국가』
플라톤은 『국가』에서 수많은 악(惡)에 의해 변형된 영혼의 모습을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에 비유한다. 풍랑에 의해 부러지고 닳아 훼손된 글라우코스의 몸에는 조개류와 해초, 돌이 엉겨 붙어 자라나, 그의 본래 모습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어 마치 짐승과도 같다. “파도에 의해 으스러지고 훼손되었으며, 다른 부분들은 조개껍질과 따개비가 달라붙어, 자연스러운 본래의 모습보다는 야생 생물에 더 가까워”¹ 보이는 글라우코스는 영혼이 외부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본질을 잃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은 영혼의 진정한 본성을 덮어 숨기는 동시에, 그것을 보호하거나 구속하는 층을 형성하여 왜곡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사유는 변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한다. “빛을 따라 망설임 없이 나아가 지금 가라앉아있는 이 바다의 깊은 곳에서 떠올라, 바위와 따개비들로부터 깨끗이 벗어날 수 있다면 영혼이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²
이 은유에서 따개비는 부착 혹은 정착과 생존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따개비는 바위나 심지어 배와 같은 안정적인 표면에 스스로를 고정시키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삿갓 모양의 단단한 석회질 껍데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이중적 특성은 역설을 드러낸다. 안정적인 환경에 붙어 주변 조류가 운반하는 만각을 휘저어 플랑크톤을 걸러내며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그들이 정착한 표면에 구속되어 그들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난 환경적 힘에 종속된다. 그들은 완전히 수동적이지도, 온전히 주권적이지도 않다. 간신히 생존할 뿐이며, 그마저도 환경과의 불가피한 의존이 만드는 제약 속에서만 가능하다.
송예환은 지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The Internet Barnacles 인터넷 따개비들》에서 따개비의 생태적 특성에 주목한다. 디지털 식민주의, 기술 유토피아주의, 그리고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표면 아래 감춰진 사용자들의 불편함과 불안을 다뤄온 그간의 작업을 바탕으로, 사용자와 플랫폼 간 관계를 탐구하는 일련의 작품을 선보인다. 송예환의 작업은 표준화된 플랫폼에 의해 점차 균질화되고 제한되는 현대 디지털 환경의 과도한 편리함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러한 생태계 내에서 소외된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을 탐구하며 그 내면에 가려진 사용자의 불안을 포착한다.
전시는 사용자와 인터페이스가 처음 만나는 표면에서 시작하여 디지털의 심연으로 향하는 서사적 움직임으로 펼쳐진다. 《The Barnacles 따개비들》(2025)은 사각형으로 잘린 수없이 많은 마분지 조각들이 조립되어 영상이 투사되는 설치 작업이다. 이 모듈형 설치물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디지털 세계와 접속하는 인터페이스로 작동한다. 마치 따개비가 유영하는 유생에서 시작해 여러 번의 탈바꿈을 거쳐 마침내 정착하듯이, 우리의 신체와 의식은 점진적으로 디지털 시스템에 적응하고 변형된다. 겉으로는 매끄러운 상호작용이 제시되지만, 그 표면 아래에서는 예측 알고리즘, 감시, 데이터 추출의 기계장치가 끊임없이 작동한다. 이러한 숨겨진 흐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묘하고도 만연한 방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재구성한다. 디지털 픽셀 배열과 따개비 군집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이 조각적 형태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의 디지털 현존을 결정하는 능동적 주체인가, 아니면 따개비처럼 외부 조류의 자비에 의존해 생존하는가?
서로 가까이 붙어 살며 정보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바위나 선박의 표면에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따개비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적응과 밀집된 공생은 우리를 구속하기도 한다. 디지털 인프라의 요구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알고리즘의 흐름을 체크하고 걸러낸다. 입구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업데이트를 확인하고, 만각을 휘저어 콘텐츠라는 플랑크톤을 소비하며, 다른 이들과 끝없는 알림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끝없는 스크롤 속에서 부유하며, 짧은 순간들을 탐닉한다. 조회수를 초조히 확인하고, 좋아요와 댓글의 알림을 기다리며, 디지털의 조류에 스스로를 맡긴다. 새로 올라온 콘텐츠는 플랑크톤처럼 쏟아지지만, 그 흐름을 따라잡으려는 우리는 점점 더 초조하고 조급해진다. 이러한 반복적인 디지털 행위는 우리를 플랫폼이라는 표면에 더욱 단단히 고착시킨다. 즉, 디지털 생태계 속 사용자들은 따개비가 석회질을 분비하여 표면에 붙어사는 것처럼,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흔적들을 남기며 시스템에 자신을 고정시킨다. 가치를 추출하는 시스템에 우리를 묶어두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디지털 사용자의 역설을 반영한다. 연결성과 생존을 약속하는 시스템은 순응과 복종을 요구하며, 주체성을 알고리즘적 제약에 의해 파편화된 환상으로 전락시킨다.
전시 공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관람객은 마치 심해로 잠수하듯 점점 더 조밀하게 얽힌 디지털 생태계의 층위들을 경험하게 된다. 송예환은 두 개의 작품을 통해 사용자의 정서적, 심리적 차원을 깊이 탐구한다.《The Whirlpool》(2025)에서는 조각이 최면적인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이는 마치 알고리즘 시스템이 사용자를 콘텐츠와 상호작용의 흐름 속으로 피할 수 없이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그 옆의 《The Surfers’ Suspicion 의심하는 서퍼들》(2025)는 단일 스크린 설치로,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파편화하고 증식시켜 끝없는 반사와 연결의 현기증 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들은 알고리즘 생태계 속 삶에 동반되는 불안과 공포를 단순한 개념적 제안이 아닌 신체적, 실존적 경험으로 구현한다. 끊임없는 감시의 공포, 단절에 대한 불안, 과도하게 표준화된 시스템의 질식할 것 같은 경직성은 복잡한 제약의 그물을 형성한다. 멜로디 주의 관찰처럼, 겉으로는 매끄러워 보이는 인터페이스가 그 아래 복잡한 통제 메커니즘을 감추고 있음을 암시하며, 사용자 간 경험을 항해와 협상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몰입적 환경을 통해 송예환은 디지털 속박과 심해 탐사의 실존적 도전 사이 평행선을 그린다. 이곳 모두 생존이 외부 시스템에 의존하는 공간이며, 주체성의 희소성이 산소의 희소성을 반영하고, 주변 힘의 압력이 모든 움직임과 선택을 형성하는 곳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송예환은 디지털 시대에 맞춰 플라톤의 글라우코스 우화를 재맥락화한다. 따개비와 잔해로 뒤덮인 바다의 신처럼, 우리의 디지털 존재는 알고리즘적 부착물과 플랫폼 의존성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디지털 조류에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정보를 필터링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남기는 데이터의 흔적들은 플랫폼이라는 표면에 우리를 점점 더 단단히 고정시키고, 시스템의 가치 추출 과정 속으로 서서히 잠식된다. 송예환의 작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용자는 따개비처럼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시스템에 수동적으로 매달려 있는가, 아니면 역동적인 생태계 속 따개비처럼 적응하고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 플랫폼은 어떠한가? 그들은 불변의 거대 구조물인가, 아니면 긁어내고, 재상상하고, 되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플라톤의 은유는 비판만이 아닌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도록 묻는다. “심연으로부터 떠올라” “깨끗이 벗겨질 수 있다면”어떠한가?³ 송예환의 설치 작품들은 우리가 디지털 인프라의 격동치는 물살을 헤엄치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는 글라우코스의 신성한 본질, 즉 네트워크화된 존재 아래 지속되는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본질이 남아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제 남은 질문은 디지털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지탱하고 동시에 제약하는 시스템들과의 불가피한 얽힘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이다.
글. 장은하
ⓒArtifacts. All rights reserved.